크나큰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졌다 하여 병풍바위라 부른다. 수십길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넓은 암반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리 깊지 않은 이곳 소에서 밤마다 신선이 내려와 목욕하고 노닐던 곳이라 한다. 어느날 목욕을 하고 돌아가다 그만 잊고 간 "관"이 바위로 변했다 하여 갖바위 또는 선관이라 부른다.
한편 강천사를 찾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 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섬뜩하여, 죄를 지은 사람은 바위가 넘어와 자기를 덮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 죄를 지은 사람은 병풍바위 밑을 지나갈 수 없었다. 또한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얄팍하고 마음에 드는 돌만을 골라 바위틈에 끼우고 자기의 소원을 빌었다 하고 호랑이는 새끼를 낳으면 이곳에 와 떨어뜨린 후 올라온 새끼만을 자기 새끼로 인정하여, 데리고 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금강교를 지나 좌측 산기슭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바위 하나가 장군의 투구를 닮았다 하여 투구봉 또는 장구바위라 부른다. 그 옆으로 신의 조화가 아니면 뚫을 수 없다는 금강움이 있고, 뒷편으로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모습이 호랑이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호두암 또는 범바위라 부른다. 그 옛날 많은 풍류객들이 즐겨 찾은 아름다운 계곡으로 청수암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선비들이 시를 읊조리며 물위에 잔을 띄우던 암반이 있어 자연의 희귀함과 신비함을 느낀다.
순창군 백산리의 아미산 꼭대기에 시루봉이 있다. 그런데 이 시루봉을 장원봉이라고도 한다. 장원봉은 풍산면ㆍ옥과면ㆍ팔덕면 순창읍 등 4개면에 걸쳐 있어 풍산면 것이라 할 수 없고 순창군 전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원봉은 원래 시루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시루봉은 아주 큰 시루를 딱 엎어놓은 것같이 생겨서 시루봉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 이 장원봉은 삼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한 면으로만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풍산면 상죽리 마을 뒤에 서당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지금도 이곳을 서당터라고 부른다.
과거엔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풍산과 금과 쪽에서 학동들이 모여들어 서당에서 수학을 했다는 것이다. 서당에서 공부를 하면 언젠가는 시험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서 장원을 하게 되면 누구든지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시험에서 항상 장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서당에서 시험만 치르면 장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장원을 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된 것이다. 몇 번이고 장원을 하지 못하자 속이 매우 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혼자 생각하기를 ' 그 사람을 이렇게 두었다가는 나는 한 번도 장원을 하지 못하지 '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그 사람을 감언이설로 꾀었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동원했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무슨 핑계를 대가지고 장원한 사람을 시루봉 위로 놀러 가자고 해놓고 같이 올라갔다. 장원한 그 학동은 전혀 낌새를 알지 못하고 친구들끼리 놀러 간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왔으니 술 한 잔 먹고 놀다가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지자 살짝 장원한 학동과 이야기하는 듯하며 정상에서 발로 차서 밀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장원한 학동이 떨어지면서 흘린 뻘건 핏기가 있고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장원한 사람의 한이 바위에 남아 있다고 하여 장원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홀어미 산성은 순창읍 백산리 산 55번지에 있다. 높이는 9m, 주위가 230m의 석성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70호이다. 여기에 얽힌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옛날 옛적 고려 때의 일이다. 이 고장에 양(楊)씨 성을 쓴 미모의 과부가 있었는데 총각 설(楔)씨가 죽자 살자 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절개를 지키고자 한 양 과부는 재가할 뜻이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총각을 보기만 해도 정이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찾아와 사생결단하고 덤벼 오므로 보통으로는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내기를 해서 이기는 쪽 주장대로 하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고 내기를 시작하였다. 내기인 즉은 양(楊)과부는 홀어미산 위에 석성을 쌓기로 하고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 남대문 문패를 떼 오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날로 내기는 시작되었고 총각은 서울로, 양(楊)과부는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사흘 만에 총각은 서울 남대문 문패를 떼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양과부는 돌 한 덩이를 더 올려야지만 성이 완성 되게 되었으므로 양과부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그러니 양과부는 꼼짝없이 총각에게 시집을 가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양(楊)과부는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가 쌓아올린 석성 위에서 층암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가마 타고 신행길 가는 이들은 이 길을 피하여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그 길을 지나면 과부가 된다는 속설 때문 이었으며, 그 뒷사람들은 이 산성을 홀어미가 쌓았다 하여 홀어미 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중국 원나라 초에 아홉 아들을 둔 과부 할머니가 이 성을 쌓았는데 할머니는 원래 이 고장의 으뜸가는 부자로 변(便)씨의 부인이었다가 남편을 사별하고 많은 곡식을 저장하고 지킬 방도가 없어 오랫동안 생각 끝에 떼도적을 막기 위해서는 성을 쌓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슬하에는 아들 9형제 외에도 며느리가 아홉이고 손자가 20명이고 거느리는 종복이 50여명에 이르니 집안 식구만 동원해도 백명 가까이 되었다. 이 대가족이 돌을 운반하고 나무를 자르고 하여 순식간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성 안에는 물이 없으므로 비상시에 대비하여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우물을 팠는데 단물이 용출하여 몇 백 명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나왔으며 그 밖에 허드렛물이 필요할 것에 대비하여 또 한 군데를 팠더니 훌륭한 연못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이룩된 할미성은 후세에 이 고장 관곡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였으며 전란으로 어려울 때는 읍을 지키는 방어성 역할도 하면서 오늘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중세에는 이곳에다 성황당을 지어 놓고 이 지역 민속 신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아직은 확실한 자료가 없어 고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팔덕면 광덕산의 강천사 건너편에 층암절벽 봉우리 위에 맷방석만한 반석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바위에 다가 삼인대라 새긴 것은 감격스러운 충의담 한 토막이 전해 오기 때문이다. 연산군(燕山君)의 학정이 극에 이르자 1506년(연산군 12년) 드디어 박원종(朴元宗, 1467∼ 1510),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등이 주동이 되어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 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瞋城大君)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政)이다.
신씨(愼氏)는 연산조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 중종반정(中宗反政)을 주동하고 성공한 박원종(朴元宗)등 반정공신(反政功臣)들은, 신수근(愼 守勤) 일파가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을 왕비(王妃)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中宗)에게 폐비(廢妃)를 강요하였다. 이에 중종은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결국 공신들의 강압에 못이겨 신씨(愼氏)를 폐출(廢黜)하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새 왕비(章敬王后)로 맞아들였다.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는 왕자를 낳고 살다가 결혼한 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 에 사망하였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사망하자, 이때 순창군수(淳昌郡守)인 충암(庶庵) 김정(金淨, 1486∼ 1521), 담양부사(潭陽府使)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1∼1530), 무안현감(務安縣監) 석헌(石 軒) 유옥(柳沃, 1485∼1519)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비(愼妃)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기의 관인(官印)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 놓고 맹세한 곳이 여기라 하여 이곳을「삼인대(三印 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은 관직으로부터의 추방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는데, 당시 무안현감인 유옥(柳沃)에게는 노모(老母)가 계시는데 형제가 없었다. 그래서 순창군수인 김정(金淨)과 담양부사인 박상(朴祥)은 "우리는 형제가 있으므로 죽게 되어도 다른 형제가 부모를 모실 수 있지만 그대가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노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의 이름을 빼는 것이 옳다"고 하여 상소문(上疏文)에는 유옥(柳沃)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신씨(愼氏) 복위상소(復位上疏)가 올라가니 조정에는 반정공신(反政功臣)들이 적극 나서서 이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에 정광필(鄭光弼)이 극적으로 말려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김정(金淨)은 함림역(含琳 )으로 박상(朴祥)은 오림역으로 유배 되었다. 김정(金淨)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中宗 14)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521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리고 유옥(柳沃)은 복위상소(復位上疏)로 인한 화는 면했지만 얼마 후에 병으로 죽었다. 그 후 1775년 (영조 51년)에 조정에서는 신비(愼妃)를 복위하였고, 단경왕후(端敬王后)라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