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음식은 거의 모두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장류로 간을 맞추고 맛을 내므로, 장의 맛은 곧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기본 요인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장 담그기가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683년에 왕비를 맞을 때 납폐품목(納幣品目)에 간장과 된장이 들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대두류가 2,000년 전에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무렵부터 장을 담그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한 때는 장을 담그기 위한 메주를 쑬 때 대두에 진맥을 섞었다고도 하나, 그 후의 기록을 보면 중국장에 비하여 콩만으로 메주를 쑤었다는 설이 있다.
좋은 장을 담그기 위하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배려를 하여 왔으며, 이러한 풍습은 지금까지도, 다만 분량이 크게 줄었을 뿐 대부분의 가정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초, 중기에 기록된 '증보산림경제'와 '구황촬요'에는 각각 조장법항과 장제품조가 마련되어 있어 좋은 장을 담그는 방법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식생활에서 장류가 얼마나 중요한 식품이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 제품조의 첫머리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은 모든 음식 맛의 으뜸이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아니하면 좋은 채소와 고기가 있어도 좋은 음식이라 할 수 없다. 설혹 촌야(村野)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어도 여러 가지 좋은 맛의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 걱정이 없다. 우선 장담그기에 유의하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게 함이 도리이다.
조선시대 중엽에 기록된 [산림경제]라는 고서(古書)를 통해 보면 간장을 '청장'이라 불렀고, 이때에 와서 콩 위주인 간장, 된장 병용의 장 담그기가 전통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콩은 오곡의 하나인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식이란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면, 콩의 힘이 가장 큰 것이다. 후세 백성들은 잘 사는 이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으므로,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돌아가 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 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로지 이 콩 뿐이었다.
문헌상 콩의 처음 등장은 주대(周代) 춘추시대의 문헌인 '시경(時經)'이며, '숙(菽)'이란 단어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남부에서 잘무래한 콩이 들어왔는데 이것을 소두(小豆)라하고 숙을 대두(大豆)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콩을 재배한 것은 초기 철기시대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가지는 콩의 재배 및 저장 기록은 백제의 옛 도성 부여의 군창지 출토인 탄화된 콩에 근거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으로 추정된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대두(大豆)의 '大'에 콩알맹이를 나타내는 점을 찍어서 '太'로 하고, 이 글자를 '콩태(太)'라 하여 콩을 뜻하게 되었다. 콩이 이렇게 오래 전부터 재배된 까닭은 식용해 보고서 그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09년(숙종 9) 빙허각 이씨가 부녀자를 위하여 엮은 일종의 여성 생활 백과이다.
현재 목판본 1책(가람문고판), 필사본(2권 1책)으로 된 부인필지(1권 1책. 국립 중앙 도서관 소장본) 및 개인소장본(필사본 6권) 등이 전해지고 있다. 본래 작자.제작연대 등이 미상이었으나, 1939년 [빙허각 전서]가 발견되면서 이 책의 1부작으로 확인되었고, 작자도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의 형수임이 알려졌다. 여성들에게 교양지식이 될 만한 주사의, 재의, 직조, 수선, 염색, 문방, 기용, 양잠 등에 관한 것이 한글로 수록되어 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각종 비결과 문자가 많아 당대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순창 고추장을 지역특산품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고추장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와 양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특히 이 책에서는 고추장을 담글 때 소금이 아닌 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새로운 방법이 소개되고 있으며 맛을 좋게 하기 위해 대추 두드린 것과 육포가루, 꿀을 한 숟가락씩 넣으면 좋다고 하였다.
B.C. 1600년경 중국은 중국 해안을 따라 티베트를 건너 Kashgar로 향신료 등을 가져갔고 그것들은 알렉산드리아, 페르시아까지 운반되어 중요 무역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위험한 여정과 많은 미스터리에 둘러싸여 향신료의 가치는 매우 높아졌고 이후 향신료의 운반 경로는 바닷길로 옮겨졌으며 중국 해안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상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향신료에 대한 지식과 함께 이집트와 지중해 지역까지 퍼져 나갔으며 히포크라테스(현대 의학의 아버지)와 호프라투스(그리스 철학자, 식물학자)는 의학적 가치가 있는 많은 향신료를 포함한 식물에 대해 기술하기도 하였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유럽의 베니스, 바스라,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등 많은 도시들은 향신료 등의 무역 중심지로 변해 가는 데서 오는 전쟁 등의 심각한 변화를 받아 들여야 했으며 후추와 다른 몇몇 향신료들의 무역의 가치가 매우 높아 유럽 왕정 시대에는 경제적 부흥을 가져 주기 위해 탐험대를 보내게 되었다.
15C 경 마르코 폴로, 바스코 다가마, 카벨 등 그리고 이후 콜럼버스와 그 수행원들은 향신료의 생산국에서 무역항까지 바닷길을 확립하고 향신료의 생산국인 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여 약 3세기 동안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잉글랜드, 아시아 지역인 들과 격렬한 전쟁을 하였다. 이후 유럽국가의 전매에서 미국으로 향신료 무역이 옮겨짐에 따라 중요 무역 중심은 동쪽으로는 싱가폴, 켈커타 서쪽으로는 뉴욕, 런던, 함부르크 등으로 옮겨졌다. 먼 나라의 식민지화와 향신료 무역의 국제화는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향신료의 국제무역은 증가되었고 이 지역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소개되어졌다.
아시아로부터 온 후추, 생강, 심황 등은 남아메리카를 통해 아프리카 나라들로 소개되어졌고 고추, 바닐라 등 모든 향신료는 중·남아메리카에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전파되었다. 향신료 중에서도 화려한 색의 고추는 고대부터 세계의 인기 있는 많은 요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492년에서 1493년 첫 탐험대 콜럼버스는 새로운 세계의 원주민들이 aji 혹은 axi로 불리 우는 화려한 붉은 과일을 대부분의 음식에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첨가물은 이 탐험에서 찾으려 했던 아시아 후추보다 더 강한 향신료였다.
그들은 그 과일의 견본을'red pepper'란 이름으로 스페인에 가져갔다 1495년 컬럼버스의 2번째 여행의 동반자였던 De Cuneo는 '우리가 사과를 먹는 것처럼 카리브 사람이나 인디언들은 덤불 같은 장미 나무에 열린 육계피 같은 긴 과일을 즐겨 먹는다' 라고 더 명확하게 보고하였다.
탐험대에 참가했던 내과 의사 Chanca는 원주민들은 이 음식 첨가물을 조미료와 약품으로 모두 사용한다고 보고하였으며 16세기와 17세기를 걸쳐 좀 더 광범위하게 여행한 다른 여행자들은 인디언의 음식 속에 불같은 열매인 'uchu'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묘사하였다.